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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배우 신성일 사망으로 본 연예인들의 정치 도전사

1978년 10대 총선 홍성우 최초…도전자 많았지만 '성공적 안착' 사례 없어
기사입력 2018.11.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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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과 엄앵란 결혼.jpg

원로 배우 신성일 씨가 지난 4일 새벽 3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답게 연예계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애도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중한 외모와 빼어난 연기력으로 고인이 한국 문화예술계에 남긴 유산은 거대하다. 그러나 고인은 난잡한 사생활로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기보다는 빈축을 사는 일이 잦았다.

또한 말년에 저술한 자서전에는 자신과 사귀었던 유명인사들의 이름과 내밀한 사생활을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고스란히 적어 대중들에게 노출함으로써, 상대방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점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고인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후세의 몫이라고 보이며, 영욕의 세월을 살아온 고인의 명복을 빈다.  

batch_신성일 포스터_batch.jpg
고인은 배우로 유명했지만 정치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고인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계 진입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여러 차례의 낙선 끝에 본래의 본명인 강신영을 예명인 강신성일로 고치기까지 하여, 2000년 제 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향인 대구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힘들게 쟁취한 국회의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고, 국회의원 임기 말년에는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아 영어의 몸이 되기에 이른다.

배우로서는 무수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한 채 쓸쓸히 4년 만에 정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연예인들이 정계 입문에 도전해왔지만, 대부분은 연예계와 정치계가 지닌 본질적 차이에 한계를 느껴, 정치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 정계를 떠난 경우가 많다.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중 한명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아놀드 슈왈츠제너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처럼 유명 영화배우였던 정치인들이 상당한 성취를 이룬 사례가 있는 미국과 견주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연예인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정계에 썩 성공적으로 안착한 인물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연예인인 동시에 정치인이기도 했던 고인의 사망에 즈음하여, 한국 연예인들의 정치 도전사를 최초의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된 10대 국회부터, 각 국회 회기 별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official_portrait_of_president_reagan_1981.jpg▲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img_3530.jpg▲ 제38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아놀드 슈워제네거


정치 행사 동원부대 역할 넘어 ‘직접 참여’로

20세기 중후반까지 연예인들은 흔히들 ‘딴따라’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천한 직업군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마도 연예인들이 정치계 행사에 동원되는 경우는 있었어도,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직접적으로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문화, 예술의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입지는 사실 클 수가 없었다.

그러던 1970년대 후반 텔레비전의 보급이 상당해지고, 1981년에는 컬러 TV가 개국하면서, 연예계의 파이도 커지고, 연예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그 무렵 최초의 연예인 출신 정치인이 배출되었다. 

1970년대 훗날 전두환 정권의 방송 통폐합 조치에 의해 강제폐쇄된 동양방송(TBC)의 ‘데릴사위’에 출연해 인기를 모았던 홍성우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홍성우 배우.jpg

그는 1978년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2위를 득표하여, 신민당 고흥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7세였다. 당시에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 씩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2위를 해도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79년 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동일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태수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번에는 1위였다.

홍성우 포스터.jpg
1985년 2·12 총선에서도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여, 2위를 차지, 이번에는 훗날 ‘미스터 쓴소리’로 유명해지는 신민당의 조순형과 함께 당선되어, 3선 고지에 올랐다.

순탄하게 보였던 홍성우 씨의 정치 행보는 민주화 이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부정축재 의혹에 연루되어 불출마를 선언한 홍성우 씨는 이후 민정당에서 민자당으로 이어지는 민자당계 정당을 탈당하고, 정주영 회장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한다.

1992년 14대 총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서울 노원구 을에 출마해 24%를 얻는 기염을 토했으나, 훗날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17대 국회의장을 지내는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 자민련을 전전했으나, 다시 여의도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는 없게 되었고, 쓸쓸히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최초의 연예인 출신 정치가인 홍성우 씨가 정치계에 나름대로 잘 안착한 뒤, 몇몇 연예인들이 정치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중견 연기자 이낙훈 씨는 1980년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정계에 발을 담갔고, 1981년 4월 11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56번을 배정받아 당선, 1985년 4월까지 1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낙훈 미스터큐 1998.png▲ 이낙훈

이 선거에서는 MBC 뉴스데스크 진행자이기도 했던 하순봉 씨 역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또 이대엽이라는 걸출한 배우 역시 국회의원으로 배출되기에 이른다. 1960년대 최대의 히트작인 신상옥 감독의 전쟁영화 <빨간 마후라>에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그 이대엽이었다.

이대엽 빨간 마후라.jpg▲ 이대엽

이대엽 씨는 전두환 정권의 어용야당들 중 하나였던 군소정당인 신정당의 후보로 성남에 출마, 민주정의당 오세응 전 의원과 동반 당선되었고, 12대 총선에서는 역시 어용야당이었던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 오세응과 동반 당선되었다.

이대엽 씨는 민주화가 된 이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민자당과 자민련 소속으로 각각 출마한 14, 15대 총선에서는 연거푸 낙선하며, 4선 도전에는 실패한다.

그렇지만 이대엽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에 당선되며 정치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는데, 2006년에도 재선에 성공한다.

회계과-성남시청사[항공촬영)5.jpg▲ 지방자치단체 재정 낭비의 상징이 되어버린 성남시청 호화청사

그러나 성남시장 시절 과도한 재정낭비를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임기 말년인 2010년에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징역을 살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이대엽 전 의원은 2015년 2월 병상에서 사망했다.

고 신성일 씨 역시 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자신의 첫 정치계 노크였다. 서울 용산구, 마포구에서 한국국민당 공천을 받아, 본명인 강신영으로 출마한 신성일, 그러나 민주정의당 봉두영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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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제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중견배우 최민수 씨의 선친인 최무룡 씨가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선거구에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당적으로, 협진양행 창업주 출신 이용호 의원을 266 표 차이로 근소하게 꺾고 당선되었던 것이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에 합류한 최무룡 씨, 하지만 국회의원으로서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92년 열린 14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는 민정계 박명근 후보에게 공천에서 밀려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최무룡 씨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에 임명되었으나, 비리혐의로 구속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다.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원로배우 이순재 씨 역시 1988년 선거를 통해 정계 입성을 시도했다. 서울 중랑구 갑에 민정당 소속으로 출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재 씨는 인권변호사 출신 이상수 평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14대 총선 통일국민당 바람 타고 대거 진출

1992년 열린 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제법 많은 수의 연예인 국회의원들이 배출되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창당된 통일국민당이 정치적 입지의 열세를 높은 인지도로 만회하기 위해, 지명도가 높은 인기 연예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batch_이주일 선거_batch.jpg
인기 코미디언 이주일 씨를 삼고초려 끝에 영입해 경기도 구리시에 출마시킨 정주영 회장은 <수사반장>으로 명성을 얻은 최불암 씨를 전국구 5번으로, 푸근한 이미지의 강부자 씨를 전국구 8번으로 출마하게 하여, 당선시킨다.

그러나 통일국민당 당적으로 당선된 세 사람 모두 정치계에 순탄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다.

그 해 열린 대선에서 정주영 회장이 낙선하고, 현대그룹이 김영삼 정부의 대대적인 세무조사 대상이 되자 통일국민당은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으로 흡수통합 되었다가, 민자당으로 다시 재흡수되는 등 여러 부침을 겪었고, 소속 정치인들 역시 그러한 격랑 속에 입지 약화 등을 겪어야 했다.

강부자 씨와 이주일 씨는 14대 국회 회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이주일 씨는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국회에서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라는 말을 통해 정치판에서 받은 상처가 컸음을 에둘러 고백했다.

최불암 씨는 1996년 신한국당 후보로 영등포 을에 출마, 재선에 도전했지만, 당시 32세의 신예였던 국민회의 김민석 후보에게 큰 차이로 낙선했고, 정계를 떠났다.

1992년 선거에서는 이순재 씨 또한 민자당 당적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중랑구 갑에서 4년 전 자신을 떨어뜨렸던 이상수 의원에 설욕한 것.

하지만 이순재 씨도 대다수 연예인 출신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와는 맞지 않았는지 1993년 민자당 부대변인을 잠시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국회의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는 외도행위를 하다가, 14대 국회 회기 종료와 함께 정계를 은퇴하고 브라운관으로 되돌아갔다.

이선희 힐링캠프.jpg

1991년 실시된 시도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가수 이선희 씨가 민자당 소속으로 출마해 서울시의원에 당선되었고, 김을동 씨는 비록 낙선했지만,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선희 씨는 1년 3개월 뒤인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 야당 소속으로 임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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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카리스마의 배우 이덕화 씨가 경기도 광명시 갑 선거구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이덕화 씨는 국민회의 남궁진 전 의원에게 패배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본래 민주당 소속이었던 김을동 씨는 자민련으로 말을 갈아타 서울 종로구에서 국민회의 이종찬, 민주당 노무현, 신한국당 이명박이라는 초거물 3인방과 맞붙는 대 모험을 했다. 하지만 8%를 얻는데 그쳐야 했다.

신성일 씨도 신한국당 소속으로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15년 만에 국회의원직에 재도전해보지만, 당시 대구를 강타한 반 YS 감정과 자민련 돌풍에 밀려 낙선했다.

최불암, 이덕화, 김을동, 신성일 씨 네 사람의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구로 갑에 출마한 정한용 씨는 당선의 영광을 품에 안았다.

하지만 정한용 씨는 다음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젊은 피 수혈로 들어온 이인영 현 의원에게 밀려 구로 갑 공천을 받지 못했고, 울며겨자먹기로 인천 연수구에서 자민련 간판을 걸고 출마해 보았지만, 한나라당 황우여 후보에게 낙선하면서 정치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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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거에서는 원로 영화배우였던 신영균 씨가 신한국당 전국구 1번을 배정받아 국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연예인 뿐 아니라 1996년 총선에서는 정동영, 맹형규, 변웅전 등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에 입문하면서, 정치와 방송의 경계가 상당 부분 허물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문화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1998년 출범하면서,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예술 융성정책이 시작되자, 예능 프로그램의 질도 상승하고, 방송 출연 연예인들의 위상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러한 문화 예술 융성 정책은 훗날 한류 열풍의 뿌리가 될 만큼 강력하고 탄탄했다고 평가받는다.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할 정도로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던 중견 연극, 영화배우 손숙 씨를 환경부 장관에 임명한다.

연예인 등 문화예술인들의 저변을 비단 문화, 예술 관련 분야 뿐 아니라 다른 사회 각 분야로도 확대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중도 반영된 인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 경험이 일천했던 손숙 장관은 장관으로서는 미숙함을 수차례 드러내었고, 몇 달 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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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개그맨 김형곤 씨가 무소속으로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했다.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시사 풍자 개그로 유명했고, 본래는 재야단일후보였던 고영구 후보를 지지할 정도로 의식 있는 연예인으로 불렸으나, 1990년대 중반 들어 자민련에 합류했던 터였다. 

그러나 김종필 총재와의 불화로 1999년 자민련을 탈당하고, 2000년 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서 국회 진입을 해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현 청와대 비서실장인 임종석 후보에게 밀려서 낙선했다.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도, 거대 정당들을 놔두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인에게 유권자들은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 선거에서 낙선한 뒤, 김형곤 씨 역시 이주일 선생이 말했던 것처럼 “개그 잘 배워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본업인 코미디로 돌아갔다.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김을동은 16대 총선에서는 성남시 수정구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낙선이었다.

김을동은 17대 총선에서는 자민련을 떠나 한나라당으로 출마했지만, 3회 연속 낙선의 쓴잔을 마셨을 뿐이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신성일 씨는 이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되며, 그토록 염원했던 금배지를 달고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영광을 획득하게 된다. 


김명곤 장관.jpg▲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
김을동, 3전4기로 국회 입성 성공했지만…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연예인 출신들의 출마가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7대 국회를 끼고 있는 참여정부에서는 중견 영화배우 김명곤 씨가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손숙 장관과는 달리 김명곤 장관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서의 소임을 훌륭하게 해내며 1년 2개월간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퇴임했다.

또 비록 연예인 출신들의 직접적 정계입문 시도는 없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연예인들의 사회참여와 사회비판 등이 활발해지며, 많은 연예인들이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후원회에 참석하는 장면들이 생겨났다. 

2008년 3전 4기만에 제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을동은 국회의원이 되는데 성공했다. 친박연대 비례대표 5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것이었다.

여세를 몰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새누리당 소속으로 서울 송파구 병 선거구에 출마해서 연거푸 당선된 김을동 의원은 재선 의원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batch_김을동 포스터2_batch.jpg▲ 김을동은 비례대표로 원내에 입성한 후 지역구 선거에서도 승리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허나 빈약한 의정활동 성적으로 지역구민들에게 악평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에 유리한 지역구인 송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후보에게 큰 차이로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18대 국회에 또 다른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은 SBS '도전 1000곡' MC 출신 한나라당 유정현 의원이 있다. 중랑구 갑에서 뉴타운 바람을 등에 업고 당선된 것이었다.

그러나 본디 친이계에 속했던 유정현 의원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이 주도한 새누리당 공천학살에 의해 컷오프 되었으며, 소리 소문 없이 정치계를 떠났다.

2010년 강원 평창, 영월, 태백, 정선 보궐선거에서는 영화배우 최종원 씨가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최종원 의원도 2012년 총선 목전에 민주통합당으로부터 컷오프 되었고, 불출마를 선언한 다음 정치계를 떠났다.

19대 총선에서는 문성근 씨가 관전자에서 플레이어로 보직을 변경하여 직접 부산 북 강서을에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떨어졌으며, 그로 인해 김을동 씨가 유일한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가 되었다.

20대 총선에서는 김을동 씨마저 낙선하며, 20대 국회 현재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은 대한민국에 전무한 상황이다.

참여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성공적으로 지내고 퇴임한 김명곤 전 장관을 제외하면, 연예인 출신으로 정치계에 입문해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정치인은 거의 드물다 싶을 정도로 적은 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물론 고 신해철 씨와 록밴드 크라잉넛, 정우성 씨 등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더라도 사회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훌륭한 연예인들이 존재한다는 데 의의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인으로서도 성공한 연예인을 보고 싶은 소망은 있다.

고 신성일 씨의 명복을 다시금 빌며,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한 연예인이 조만간에 배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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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파드마
    • 당적이 거의 다 그러네요. ㅠㅠ

      글쎄요...
      연예인의 대중적 이미지에 이끌려
      정치인이 갖춰야할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판단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저는
      연예인의 정치계 진출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또한
      이.재.명 부부의 동상이몽 예능 프로 출연의 경우에서 증명되었듯이
      정치인들이 TV 출연으로 자신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세탁하곤 하구요.

      시청자들은
      리얼예능의 재미에 이끌려
      그 재미도 철저히 계산된 방송대본의 결과물임을
      간과하곤 하죠.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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