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생활의 발견] ‘그때’가 가장 좋은 그때여야 하는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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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그때’가 가장 좋은 그때여야 하는 몇 가지

멜론 후숙처럼 모든 사물마다 그것을 취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이 있다
기사입력 2018.10.09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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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즈음에 선물로 머스크 멜론을 받았다. 후숙이 필요한 과일이니까 상온에 보관하다가 알맞게 익었을 때 먹으라는 설명과 함께. 

그런데 멜론을 먹기 좋은 알맞게 익었을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가 문제였다. 애매하게 넘어갔다가 귀한 과일을 맛없게 먹기는 싫어서 고맙다는 말보다 멜론이 알맞게 익었는지는 어떻게 아는지부터 물어보고야 말았다.

선물을 보내준 이가 말하길, “아래 부분을 손으로 꾹 눌렀을 때, 움푹 들어가는 느낌이 날 때가 멜론이 먹기 좋게 익었을 때야.” 라고 말해주었다. 기간으로는 일반적으로 3일 정도라는 구체적인 설명도 해줬다. 

뒤에 간명하게 말해 준 3일 정도라는 조건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촉진이라도 하듯 매일 일어나서와 잠들기 전에 멜론의 아래 부분을 꾹꾹 눌러보았다. 언제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은근한 설렘과 함께.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밤이 끝나면 아침이 오듯 돌멩이처럼 단단하던 멜론의 아래 부분이 더디지만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 촉감의 변화는 유별나거나 선명한 것은 아니라서, 매일 보는 여자친구가 “오빠,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같은 지옥 난이도의 질문을 해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섬세함이 필요한 정도였다. 사실은 그런 것 없고, 관심을 갖고 매일 꾸준히 만져 보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느낄 수는 있는 그런 미묘한 변화였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물을 보낸 이가 말한 일반적인 후숙 기간 3일에 맞춰서 멜론을 열어볼 순 없었다. 그때까지도 아래 부분은 ‘아직’ 충분히 부드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을 10분만 늦어도 짜증을 내는 성격인 나에게 어디서 그런 온화함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멜론을 예상 후숙 기간보다 3일이나 늦게 먹어볼 수 있었음에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즐거움이 커져만 갔다.

거의 무슨 일과라도 되듯 멜론의 아래 부분을 더듬거리다가 “됐다! 지금이다!” 라는 느낌이 와서 주방으로 가져가 멜론을 열었다.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잘 익은 멜론은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내기도 전에 달콤한 향으로 먼저 반겼다. 내가 무신경하게 내버려두다가 오늘 열지 않고 며칠 더 늦었으면 이 좋은 멜론도 본연의 좋은 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3일이라는 간명한 기간만 생각하고 다짜고짜 열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맛있게 멜론을 먹으면서 깨달은 시절의 중요성. 모든 사물마다 그것을 취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때가 가장 좋은, 그때여야만 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소개를 하다 보면 약간의 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으니 스포일러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들은 넘겨주시기를 바란다.

멜론 머스크.jpg▲ 미리보기 방지를 위한 1차원적 짤


1. 10대에 경험하는 ‘에반게리온’

이름부터 거창한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것을 둘러싼 흑막과의 대결, 주인공 신지의 성장(이런 것도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이 서사의 큰 두 개의 기둥이다.

이 중에서 전자의 줄거리는 나이나 시절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내용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10대가 아니라면 감동이나 재미의 요소가 반감된다. 풋풋한 사춘기의 소년,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고 나가지 못하는 지지부진의 시기, 자기 파괴적인 감수성같은 것은 확실히 10대일 때 가장 와닿는 감정일 것이다.

조금 넓게 보자면 20대 초반까지도 가능하긴 하다. 그 이상을 넘겨 버리면 신지라는 캐릭터는 이른바 ‘중2병’스러운 인물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neon-genesis-evangelion-wallpaper-666x500.jpg


2. 20대 초반에 읽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들

기사단장 죽이기나, 1Q84와 같은 근작들은 너무 어리거나 젊은 시절이 아니라도 읽을 수 있지만 하루키의 초기 작품의 독서 시기는 작품의 주인공과 호흡할 수 있는 20대 초반이 가장 좋다.

10대의 경우엔 이해되지 않는 감정선(아니 저기서 왜 갑자기 섹스를 해)이라든지, 문화접속적인 코드(하루키의 다양한 음악 취향과 문학 취향이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에 대한 몰이해로 작품의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

하루키의 초기작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복잡한 소설적 설계로 이뤄졌다고 하기 보단, 문장의 섬세한 터치와 센티멘털의 향연으로 보는 것이 좋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완결되고 확립된 소설적 세계는 청춘보다는 청춘에서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더 잘 읽히고, 감수성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젊은 시절이 확실히 잘 읽힌다.

추천하는 책은 초기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4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이다. 그리고 이 세계가 어느 정도 안정화를 거쳐 가장 찬란하면서도 원숙한 작품이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하루키.jpg


3. 하던 일을 벗어나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읽는 ‘허니와 클로버’

찌질한 주인공의 좌충우돌 성장, 상처를 갖고 있는 천재적인 서브 캐릭터, 각자의 방법으로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려진 만화. 그동안 열심히 산다고 살아 왔는데, 막다른 골목에 막혀서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읽기 좋은 만화이다.

두렵고 아쉽고 막막한 감정들이 나의 하루를 집어 삼키려고 할 때, “괜찮아. 이렇게도 행복해 질 수 있어! 너도 그럭저럭 괜찮은 인간이야!”라며 위로를 해주는 만화. 마음이 평안하고 하는 일이 술술 풀릴 때보단 확실히 힘들 때 읽으면 좋은 만화.

허니와 클로버.jpg


4. 늦가을에 듣는 ‘이소라’

이소라야 언제 들어도 대단한 보컬이고, 감정의 전달과 음악 전체의 완성도를 논하면 국내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수이긴 하다.

그러나 이소라의 그 서늘한 감수성은 옷깃을 여미고, 어깨를 웅크리고 걷기 시작하는 가을의 끝과 겨울의 초입에 가장 위력적이다.

‘바람이 분다’라는 희대의 명곡(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다!)으로 너무 유명한 ‘눈썹달(6집)’과 내밀한 속마음을 귓속말로 듣는 듯한 ‘Sora’s 5diary(5집)’을 추천하다. 가장 아끼는 노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이다.

이소라 2017-07-09_22;09;43.png


오늘 당신의 시절은 어떤 시절인가? 당신이 마주하는 사람들과 관계들, 여러 사물들 그것들에게 가장 좋은 시절은 언제인가?

오늘인데, 지금을 놓치면 안되는데 나의 귀찮음과 무신경함으로 넘겨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기엔 그것들이 너무 달콤한 것들인데 말이다. 한 템포, 숨을 고르고 우리의 시절에 대해서 몰두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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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3
  •  
  • 현수바라기
    • 우와 진짜 말랑말랑한 글이네요. 하루키의 소설은 개인적으로 좀 편협하지만, 일본 작가라 읽고 싶은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는데,(개인적으로 일본은 속내를 숨기는 문환 때문에 드라마도 것멑만 들어보이고 하는 편견에 치우쳐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한 번 책을 사봐야 겠다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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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블루덕흔
    • 정말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긴 싸움입니다.
      즐기면서 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응원합시다.
      건강한 뉴비씨 응원합니다.
    • 0
  •  
  • W.Kim
    • 권기자님 페북글 타고 들어왔다가
      추억의 에반게리온을 소환하고 갑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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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뉴비
    • 정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쉽게 재미나게 잘 쓰시네요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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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배미정
    • 내가 서있는 시절은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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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마워요
    • 좋네요 이런글.. 퇴근을 기다리며 읽으니 더더욱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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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긴갑술
    •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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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키위나무
    • 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좋네요.
      장명철 기자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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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파이산
    • 따뜻한글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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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 몰캉해지는 글이네요.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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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재조산하
    • 말랑말랑한 글 ~^^ 좋으네요.
      now & here,  미래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다고.
      지금이 어느 훗날 그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훗날 환히 웃으며 추억을 얘기할 그때를 상상하며
      지금 여기에서 나의 한계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때론 게으름도 부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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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승민
    • 당장 꼭 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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